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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말한다

연극 레인맨

by 캇짱 2010. 5. 16.


연극 레인맨
5월 12일(수) PM 8:00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1층 B구역 2열

남경읍, 강필석



2009년 국내에 초연되었을 때만 해도 별로 관심을 두진 않았던 작품이다. 원작이 되는 동명의 영화를 알고 있고 그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그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게다가 세상은 넓고 볼 건 많고 나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지. 이미 다 아는 내용의 작품은 예매 희망 최하위에 깔아두고 특별한 계기 (최하위가 최상위로 올라올만한 뽐뿌질)가 없는 이상 그대로 모셔만 두기 마련. 그러던 중 남경읍/남경주 형제의 캐스트로 재연이 발표되면서부터 솔깃했던 것 같다. 진짜 형제가 만들어가는 형제의 이야기라.. 이들 형제의 무대는 아직 한번도 접해본 적 없지만 워낙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고, 마침 이런 의미있는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더없이 좋은 기회다. 하지만 무시 못할 가격의 압박이라니! 지금 다시 봐도 미친 가격이다. 명색이 자유'소극장'인데 8만8천원 ㄷㄷㄷ 그렇게 지름신이 잠시 머물렀을 때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이 작품과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라며 리스트에서 지워버릴 즈음, 앵콜 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엔 무려 강필석씨가 출연한다네? 오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봐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했다. 6월까지 하는 모양이고 천천히 예매해도 되겠지.. 이상하게 티켓오픈일에 참전하지 않는 이상 예매욕구는 현저히 줄어든단 말이야. 가뜩이나 일본에 다녀온 뒤로 재정상태도 바닥이 났고 이렇게 미루고 있는 사이 막을 내려버린 공연도 많다. 이 공연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좀 더 강력한 뽐뿌질이 필요한 시점.에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으니.


원작 카츠히데 스즈키. 

원작이 동명의 영화라면서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영화를 바탕으로 세계최초로 무대화 한 장본인이 바로 스즈카츠 ㄷㄷㄷ (혹시나 동명이인인가 해서 찾아보니 이 스즈카츠가 그 스즈카츠 맞더라) 지금은 연출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과연 각본가 출신이다. 자기가 쓰고 자기가 올리고 미타니 코키 저리가라군.

그러고보니 스즈카츠의 평판 (우리 코지군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알아보던 시절, 얼핏 레인맨 소식을 들은 것도 같다. 너무 오래전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시이나 킷페이상이 동생 찰리 역이었다는 자료를 보니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 결말을 바꿔서 많이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제보니 연출가로서 결말을 바꿨던 것이 아니라 각본가로서 애초에 각본을 그렇게 쓴 것이었구나. 이 작품이 한국 무대에 올라오게 된 것은 한국판 프로듀서가 일본 레인맨 재연(2007) 무대를 보고 무한감동을 받아서 가져온 것이라던데, 역시 스즈카츠 재연작은 진리임이 또 한번 증명되나요~ 

그렇게 스즈카츠의 각본 능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반, 배우 목적 반으로 보러갔다. 이왕이면 전부터 눈여겨 보았던 남경읍/남경주 형제를 만나고 싶었지만 남경주씨는 캐스트에 이름만 올려놓고 출연하는 날이 없네. 올댓 뮤지컬 콘서트 때문인가, 맘마미아 때문인가, 키스미 케이트 때문인가; 6월부터는 나올지도 모르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캐스트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스즈카츠 뽐뿌질이 워낙 강력해서 더 이상 지체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야 차선책인 남경읍-강필석 페어의 공연을 급예매! 한 것까진 좋은데.... 강필석씨에게 차선이라는 말을 붙이다니....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이 공연에 한해서만이다ㅠㅠ

연극 레인맨의 기본 줄거리는 영화와 같다. 평생 아버지를 증오하며 살아온 찰리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자폐증인 형 레이먼과 만나 여행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가는 이야기. 이 로드무비 성격의 영화를 연극 무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등장인물 수가 무대에 알맞게 축소되고 직업이나 설정에 차이를 두는 등, 연출가나 각본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우선 영화와 달랐던 것이 동생 찰리의 직업. 영화에서는 중고차 거래상이었던 찰리가 연극에서는 인터넷 주식 트레이더로 옷을 바꿔입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영화이다보니 등장인물의 직업도 현대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었겠지. 결과적으로 노트북 한대 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고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 걸맞는 센스있는 각색이었다고 본다.
에피소드는 대체적으로 영화와 비슷하지만 오로지 연극에서만, 연극이니까 볼 수 있는 장면도 있었다. 바로 2막의 공차기 씬. 영화에서는 야구를 좋아하는 레이먼이 연극에서는 축구를 좋아한다는 설정으로 바뀌어 자연스럽게 이 공차기 씬과 연결되었다. 이 장면은 배우 둘이서 힘을 합해 목표한 횟수만큼 리프팅을 시도한다-는 커다란 틀 안에서 정해진 대사 없이 애드리브로만 이루어진다. 처음 10회는 의외로 쉽게 성공했고 그것만으로 성에 안 찼는지 15회로 횟수를 늘려 도전하더라. 그 어느 때보다 열심이고 필사적인 모습에 덩달아 캐릭터도 무너져버린(;) 강필석씨에 반해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으며 상대해주는 남경읍씨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충분히 공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안 받아주는 등 레이먼이 찰리를 가지고 노는 듯한 상황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레이먼이 공을 밟고 넘어지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넘어지는 그 순간까지 레이먼이었던 남경읍씨의 뒤에서 레이먼보다 더 당황한 강필석씨를 보는 뜻밖에 재미도 있었다. 그나저나 남경읍씨, 꽈당 하셨는데 허리 괜찮으신가 몰라.
몇 번의 도전 끝에 마침내 성공했을 때는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평소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나인데도 정신 차리고 보니 손뼉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고 있더라구. 자기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던 레이먼과 처음으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찰리. 그 감격적인 순간의 환희가 객석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훌륭한 연출이었다. 이것이 바로 라이브 무대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지. 다만 어디까지나 리프팅이 성공했을 때에 한해서 맛볼 수 있는 감정이기에 위험부담이 있어보인다. 찰리 역의 배우들은 공차기 연습 열심히 해야겠어요~

남경읍씨의 레이먼은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았고, 이거 보고 생각난 김에 영화를 다시 봤는데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가 그저 그렇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히려 톰크루즈 연기가 좋아보이더만. 남경읍씨는 물개쇼를 보고 역할 연구를 하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동작도 그렇고 소리 내는 것도 박수치는 것도 물개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연상의 분에게 이런 표현은 실례지만, 아 정말 귀여워서 혼났다. 특유의 입 모양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 하나 낭비가 없더라. 남쌤이 괜히 남쌤이 아니었어.  

강필석씨의 찰리는 초반부에는 살짝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표정 좋고 동작 좋고 연기가 어색하거나 한 건 아닌데 어딘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면이 있었달까. 그 입에서 ㅅㅂ 이라니. 차마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극이 진행될수록 레이먼과 교감을 나누며 따뜻한 형제애를 보여주는 후반부가 훨씬 좋았다. 이번 무대를 보고 깨달은 건 난 역시 노래하는 강필석이 좋구나. 이 분은 그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매력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영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결말이다. 영화에서 찰리는 청문회의 결과(법적인 절차)로 어쩔 수 없이 형과 헤어지게 된다. 레이먼이 보호시설 월브룩의 안정된 생활과 동생 찰리와의 생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 했기 때문에. 즉, 영화에서 레이먼은 혼자서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레이먼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로 월브룩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다. 그 옛날 찰리에게 본의 아니게 해를 끼쳤던 것처럼 곧 태어날 찰리의 아이에게도 자신의 존재는 위협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간 것이다. 나는 이 결말도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 자유 의지, 레이먼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면은 영화보다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그 연장선에서 레이먼이 식사를 할 때 이쑤시개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더라. 위험하다고 애초에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인데, 그것을 눈치챈 찰리가 형이 어린 애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다. 월브룩은 자폐증 환자에게 있어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일지 모른다. 하지만 보호라는 이름 아래 그들을 멋대로 정의하고 단정짓고 자유의지마저 박탈해버린 것은 아닌지.. 영화가 절제의 미학이 있다고 한다면 연극은 좀 더 친절하게 결말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결론은 각본가 스즈카츠 돋네. 워낙 영화 자체가 훌륭하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꽤나 각색을 잘했다. 특히 영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갬블 에피소드를 과감히 삭제한 것은 눈여겨볼 만 했다. 연극에서도 아예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잠깐 언급되는 정도로 영화 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영화의 성공에 기대지 않으려는 각본가로서의 프라이드가 엿보였달까. 레인맨을 비와 연결시켜 그 진정한 의미가 밝혀지기 전까지 관객들의 눈을 속이고 반전을 유도하는 일면도 좋았다. 한국판 연출도 좋았지만 스즈카츠 본인이 직접 연출한 일본판도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시이나상의 찰리라면 굉장했을 것 같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나쁜 남자 스멜이잖아~ 그렇지만 내면은 따뜻한 남자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겠지.

그건 그렇고, 아 제발 공연 중에 잡담하지 말고 찍찍이 신발 신었다 벗었다 하지 말고 자기 집 안방 마냥 의자에 발 올렸다 내렸다 하지 말고 가방 뒤적이며 부스럭 대지 말아줄 순 없는거냐. 가뜩이나 관객도 얼마 없는데 다들 어찌나 바쁘신지..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니들이 하고 있는 그게 바로 관객테러 라는 거야. 바로 전에 만난 얌전하다 못해 고요한 일본 관객들이 그리워 혼났다.


+ 카테고리명을 '뮤지컬을 말한다'에서 '무대를 말한다'로 바꿨다. 안 본다 안 본다 해도 연극도 1년에 두어편은 보는 듯.
 
+ 레인맨 가져온 김에 도리안 그레이는 생각없나요. 이것도 재연을 해야 업계 관계자에게 폭풍감동을 안겨 줄 수 있으려나.

+ 티키 데이 40% 할인으로 보고 왔는데 바로 다음 날 핫세일(50%) 뜨고 난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