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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말한다

뮤지컬 모차르트! - 박은태, 임태경 모차르트 감상

by 캇짱 2010. 2. 2.
지난 일요일에는 세종에서 '살았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낮부터 밤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낮공이었던 박은태씨 회차는 1차 오픈 때 잡아둔 스케쥴이었고 밤공인 임태경씨의 공연은 하루 전날 급지른 것이었다. 이미 이 작품 딱 한번만 보기는 글렀으니 이젠 에라~ 모르겠다. 지르자! 는 심정이다. 보통은 경계선을 그어놓고 되도록이면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일단 그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달려드는 타입이라서. 그러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임태경씨의 공연을 또 하나 잡아두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



뮤지컬 모차르트!
1월 31일(일) PM 3:00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층 C열 31번 



우선, 낮에 본 박은태씨의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중간에 계획이 틀어져 임태경씨의 공연을 먼저 만나보긴 했지만 실은 그보다 먼저 예매한 박은태씨의 공연만 딱 한번 보고 끝낼 참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예매할 당시에는 4명의 모차르트 중 누구 하나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나마 호감도 비호감도 아닌 박은태씨가 아무런 사심 없이 작품을 보게 할 것 같았고, 그것이 민영기/김승대와 만나 초 레어 캐스트로 거듭나면서 예매에 결정적인 불을 지폈다. 어차피 한번 볼건데 이왕이면 레어인 게 좋지않나. 후에 민영기씨가 윤형렬씨로 교체되면서 환상의 조합은 깨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박은태씨가 잘한다는 소문은 익히 듣고 있던터라 나의 기대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다 보고 난 감상은 글쎄.. 다른 사람들 눈엔 어떨지 몰라도 내 기준에서 이건 절대 잘하는 건 아니군. 물론 열심히는 한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뮤지컬은 노래=연기의 공식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 분은 노래만 잘.. 아니, 열심히 하는구나. 칭찬해 줄 만도 한 게 딱히 신경쓰며 듣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전달력은 발군이다. 박자도 정확하고. 오케스트라와 합이 딱딱 맞아서 연습을 많이 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지난 임태경씨 공연 때 보다 반주가 조금 느려진 감도 받았는데, 아마 이게 맞는 박자겠지. 덕분에 박은태씨의 노래는 아주 듣기 편했다. 숨 쉴 타이밍도 없는 망할 가사 원망은 하지 않게 하는 적절한 속도감이었다. 하지만 뮤지컬의 '넘버' 라면 어디까지나 극 위에 성립해야 하는 거 잖아? 캐릭터의 감정이 느껴지고 마음을 대변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거 잖아. 그런데 OST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뭥미=_=

다시 말하지만 박은태씨가 노래를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 한다. 악보에 나와있는대로 정확하게 뻗어준다. 그걸 너무 정확하게 지켜서 탈인 거지. 악보 그대로, 음표 그대로, 박자 그대로. 심지어 연기 마저 대본 그대로. 지문 그대로. 배우 자신의 느낌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볼까. 1막 마지막 넘버인 '내 운명 피하고 싶어' 에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아마데가 볼프강의 팔을 펜촉으로 찌르며 그의 피로 악보를 써내려가는 장면이 있다. 아마데가 볼프강의 팔을 찔렀을 때 볼프강은 '아아아아아-!' 라고 고통에 신음한다. 그것이 넘버에서는 배우의 쫘악 뻗어주는 고음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 날의 박은태씨는 아마데가 팔을 펜촉으로 찌르기도 전에 이미 고음을 내지르고 있더군. 왜냐, 악보에선 이 타이밍에서 질러줘야 하니까. 아마데를 연기하는 어린이의 연기를 보며 때론 조금 빨리, 때론 조금 늦게 타이밍을 맞추어야 하지만 그 때 박은태씨의 머릿 속엔 지금 고음을 올려야지 라는 생각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건 어디까지나 악보를 달달 외운거지 작품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은 안 드네.
모차르트에는 많은 넘버가 있다. 캐릭터의 감정에 따라 어느 넘버는 강하게, 어느 넘버는 여리게 표현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완급조절이 없이 시종일관 똑같은 톤으로, 오로지 넘버를 클린하게 부르는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모차르트는 자유분방한 천재이지, 연습벌레는 아니지 않는가. (물론 연습을 많이 했다는 것은 칭찬해줄 일이나 그것이 모차르트라는 캐릭터 위에 겹쳐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연기도 그의 전작인 노담의 그랭구와르 생각이 나서 한동안 집중하기 어려웠다. 속박받는 삶이 아닌 이미 그의 영혼은 자유로웠고, 팔 동작이나 걸음걸이는 음유시인의 그것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건 '모차르트' 라고 얼마나 머릿 속으로 주입시켰는지 모른다. (응당 배우가 노력해야 할 일을 관객인 내가 노력하고 있으면 어쩌나;;) 다행히도 1막 중반 즈음부터 더 정확히는 레오폴트나 난넬, 대주교 등 주변인물과 부딪히는 장면이 늘어가면서 점차 모차르트다운 모습을 보여가더라.
박은태씨의 모차르트는 비주얼도 그렇고 몸은 다 컸지만 머리는 아직 덜 큰 철부지 아들 같다. 이미 성인이지만 제 앞가림 못하고 놀기만 하는 청년백수? 아버지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고 말이지. 목소리도 미성이다 보니 목청 좋은 서범석씨나 윤형렬씨와의 대립에서 상대적 약자의 느낌이 난다. 그들과 대등하게 부딪히는 임태경씨와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임태경 모차르트의 대등한 느낌을 좋아하지만, 박은태씨의 모차르트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2막, 모차르트가 혼란을 겪는 장면에선 그 여린 느낌이 상승효과를 발휘하는데 콘스탄체에게 아이 같이 매달려 눈물을 삼키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건 콘스탄체 배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공연은 얼터인 김희선씨가 무대에 섰다. 정선아씨 보다 좀 더 어른의, 엄마 같은 느낌으로 모차르트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쉬카네더와의 술집씬에서 모차르트는 무대 오른편의 탁자에 여인 2명을 끼고 앉아있다. 이 때 옆에 앉은 여인의 치마를 들추는 그 나름의 퍼포먼스를 보며 아직은 부족하지만 연기에 대한 가능성을 읽었다는 정도로 그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한다. 




뮤지컬 모차르트!
1월 31일(일) PM 7:00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층 D열 20번 



고작 1시간의 텀을 두고 이어진 밤공연. 지칠만도 한데 오히려 밤공연이 집중도가 높았다. 임느님의 진가를 다시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고.. 지난 수요일 공연을 보고 와서 닥치고 임태경씨를 찬양하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 남아있는 의심까지 전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거든, 어쩌면 그 날 하루만 연기의 신이 내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혹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임느님이고 뭐고 당장 철회할거얏! 라는 마인드로 단단히 무장하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아놔- 어떻게 거기서 더 좋아질 수가 있어???
임느님이 뭐야, 이건 모차르트의 화신이야!!

전에 쓴 후기에 뭣도 모르고 '안무가가 정해준 안무를 무리 없이 소화한다. 똑같은 안무라면 다른 모차르트도 이 정도는 해주겠지.' 라고 했던 거 취소! 안무가가 정해주기는 개뿔. 몇 가지 동선 빼고는 전부 임태경씨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더라. 낮공연의 박은태씨랑 비교해보니 확연히 알겠더군. 임태경씨의 모차르트는 살아있단 걸..

첫 넘버인 '빨간 코트'부터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황금 자수라며 젠체하는 모습. 아버지가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 레오폴트 역 서범석씨의 성대모사를 하거나, 그저 대주교에게 알랑방귀 뀌느라고 정신없다며 장난스럽게 춤을 춘다. 어디서 났냐는 물음에 자신이 직접 샀다며 한껏 자부심을 드러내는 풍세, 빨리 작곡이나 하라고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곡은 전부 "요기!" 에 있다며 머리를 가리키는 귀여운 손 동작,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운걸. 어디 그 뿐인가. 쉬카네더의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가지고 놀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빗자루를 타는 흉내를 낼 때는 정말 덥썩 안아주고 싶었다.
베버 가족 사기단(?)의 무대를 구경할 때도 누구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게 아니라 누워서 침뱉기를 하고 있더라니까!! 이건 후에 콘스탄체와 부르는 넘버 '네 모습 그대로'의 가사를 의식한 연기임이 분명했다.'누워서 침뱉기'는 너는 특별하다며 콘스탄체가 언급하는 모차르트의 엉뚱한 행동 중 하나인데, (앞부분에 그 행위가 없으면) 사실 굉장히 뜬금없이 느껴지는 가사이다. 그런데 임태경씨는 어쩜.. 그런 행간의 의미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던 거야. 그저 넘버 하나 뚝 잘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본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어!
공개 처형에 쓰일 밧줄을 시험삼아 잡아당겨 볼 때도 원래는 볼프강이 끌려가야 마땅한데, 반대로 잔뜩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서 상대 배우를 당황케 하더라. 그것이 '모두 가짜이며 사기' 라는 것을 그런 순진무구한 행동을 통해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더라구. 콘스탄체와 '네 모습 그대로'를 부르고 무대 뒤로 퇴장하는 순간에도 "반짝 반짝 작은 별~♬"을 흥얼거리는 센스라니! '반짝 반짝 작은 별'은 모차르트의 변주곡으로써 어머니의 죽음 이후 빈에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시대적 배경까지 일치하는 이 철저히 계산된 애드리브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극중 넘버 '황금별' 과도 맞물려 생각해볼 수 있는 임태경씨의 뛰어난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남작부인이 빈에 함께 가길 권유할 때 아버지가 반대하자 아버지의 뒤에서 슬쩍 옷깃을 잡아당기는 모습, "애비에게 진 빚은 매일매일 늘어나고 있지" 할 때 서범석씨의 동작을 똑같이 흉내내질 않나.. 더 있겠지만 우선 생각나는 그의 세심한 역할 연구는 이 정도.

임태경 모차르트는 이미 다 자란 성인의 느낌이 났던 박은태 모차르트와는 다르게 몸도 마음도 아직 성장 중인 인물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그 나이대의 과도기적 느낌을 잘 표현해주었고 그것이 내 취향과도 부합했다고 본다. 아버지가 나무라거나 대주교가 그를 속박하려 들면, 잔뜩 열이 올라 달려들고 대들며 이겨먹으려 하지. 아버지의 충고에 쿵, 하고 발을 구르며 툴툴 거리고, 당장 꺼지라는 대주교 앞에서 꿋꿋하게 빈에 남겠다며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엉덩이를 단단히 바닥에 붙이고 앉아서 배째-! 라니. 그 반항심 투철하고 치기어린 모습은 극 후반부의 슬픔과 대비되어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2막 연출의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떠안은 절망감을 마지막까지 지고 간다는 점이 훌륭했다. 캐릭터 해석의 차이겠지만, 박은태씨는 마술피리 작곡할 때 즈음엔 어쩐지 자체회복한 듯 보였어^^;  

임태경씨 본인에게서 풍기는 음악의 천재스러운 분위기도 역할 몰입에 한 몫 했는데, 지휘나 피아노 싱크를 그럴싸하게 구사하는 모습은 그의 직업란에 쓰여있는 것처럼 '음악인'으로 보이기에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이었다. (주연 배우, 앙상블 통틀어서 잘츠부르크를 '짤'츠부르크라고 발음하지 않는 유일한 배우라고나 할까 ㅋㅋ) 이 작품은 그 동안 섭외가 오는 작품에만 출연했던 임태경씨가 처음으로 본인이 하고 싶어 오디션을 본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캐릭터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기 뿐만 아니라 조금 몸을 사린다 느껴졌던 노래도 이 날은 마음껏 질러주어 정말 눈과 귀가 즐거운 하루였다. 아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태경님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