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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코지/보이체크(Woyzeck)

뮤지컬 보이첵

by 캇짱 2014. 10. 27.


뮤지컬 보이첵

10월 26일(일) PM 3:00 

LG 아트센터 2열 어드메



이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준비 기간만 8년이고 그 중에 내가 기다린 세월만 1년이 넘었고 예매한 게 반 년도 전이다.

그런 기대작이었는데..........하..................


2시간 반이 고역이었다.


소재가 불편해서 즐기기 어려운 그런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미 원작을 알고 있고 오페라 보체크, 음악극 보이체크, 영화 보이체크, 

같은 원작자의 작품 당통의 죽음까지 팔 수 있는 콘텐츠는 다 파서 그런 거부감은 없을 터였다. 

오히려 이 작품이 뮤지컬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대가 컸는데.. 진심 1막 끝나고 집에 가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프레스콜 보고 카니발씬 구리단 건 알고 갔는데 그냥 극 전체가 다 구린데? 카니발씬만 구린 거 아님 ㅋㅋㅋ

오히려 카니발씬을 잘 만들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안 어울렸을 거야.  

그래도 서브 타이틀이기도 한 넘버 루비 목걸이는 들어봐야 할 거 같아서 2막까지 꾸역꾸역 버텼는데

마리 죽는 씬도 으응.....?

쓸데없는 장면에서까지 뮤지컬, 뮤지컬을 강조하더니 왜 또 그 씬에선 뮤지컬이길 포기하는 거야?

그 장면이야말로 뮤지컬의 장점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씬 아닌가?


주인공 보이첵의 감정에 이입해 멘탈이 부수어지기는 커녕 나는 그냥 보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극을 지독하게도 못 만들어서.


사실 작년 연극으로 올라온 당통의 죽음도 이자람과의 콜라보가 썩 매끄럽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건 당통 역의 박지일 씨가 극을 잘 이끌어줘서 원작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나름 참신한 시도로 보았다. 

그런데 뮤지컬 보이첵은 아니야... 이건 배우로도 살릴 수 없어.....


물론 주연 배우 김수용 씨의 연기는 기술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다만, 저 캐릭터가 저렇게 사랑 타령만 하다 끝나는 캐릭터가 아닌데

이마를 짓누르며 그분이 오셨어 같은 예상 가능한 연기를 보고 싶진 않았는데, 정도의 아쉬움이 드는데

이 텍스트로는 저 연기가 최선일 거 같아서 뭐라 하진 못하겠다. 충분히 고생하셨어요ㅠㅠ

극이 괜찮으면 더블 캐스트인 다른 배우로도 보려고 했는데 내가 이걸 보겠다고 2시간 반을 또 앉아있을 자신이 없네. 

다른 배우로 봐도 결국 사랑 타령인 건 변함 없을 테니까 여기서 멈춰야지. 


희곡 보이체크는 단편적인 30개의 장면이 초안같은 상태로 발견되어 장면배열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미완성 작품이다. 

그래서 각본가, 연출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으로 볼 수 있는 재미가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인데

그 여백의 미가 뮤지컬 보이첵에선 오히려 독이 된 거 같다.

보이체크를 사랑이야기라고 홍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리를 무슨 사연녀로 만들어놨어.

원작의 마리는 바람 피운 걸 추궁해도 때릴 테면 때려봐 식으로 나오는 여자인데

뮤지컬 보이첵에선 아이의 미래 때문이라느니 보이첵의 실험을 멈춰달라느니 

급기야 마지막엔 두 손 모으고 죽음을 기다리는 성녀가 된다. 


아니 물론 캐릭터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재해석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개연성이 떨어지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깊이도 사라졌으니 문제지.

원작의 철학적인 대사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징성 같은 건 찾아볼 수 없고

흔하디 흔한 순애보에 막장 요소 좀 뿌리고 한국 군대 왕따 문제를 끼얹은 정도?

이건 보이체크가 아니라 관심사병 박보이 일병과 고무신 거꾸로 신은 김마리지.


나름 철학적인 부분도 건드려보려고 한 거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자극적이고 저열하고 표면적으로 겉핥기만 하다가 끝난다.

민주주의니 남녀차별이니 이 무슨 계몽포스터급 주입식 메시지냐.

극을 다 보고 나서 아, 이런 메시지였구나!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대놓고 내 존엄성은 어디에, 민주주의는 어디에, 여성은 차별받고 있어요! 를 외치고 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세련되게 극 중에 녹여낼 수는 없었던 걸까. 


아이 이름은 왜 알렉스로 바꾼 걸까? 원작에선 크리스티앙이었는데..

참고로 희곡 보이체크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을 저지른 범인 이름이 요한 크리스티앙 보이체크다. 

작품 속에서 보이체크와 마리의 아이는 돈이 없어 세례를 받지 못해 사생아로 키워지는데 

뷔히너가 굳이 그 이름(크리스티앙은 세례명)을 아이에게 지어준 건 다 의미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알렉스... 

보이체크와 마리의 주변을 서성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바보 카를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 


김소향 씨는 듣기 좋은 노래와 대본에 충실한 연기로 마리 역을 무난히 소화했는데

때때로 웃는지 우는지 모르겠는 표정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군악대장 역에 김법래 씨가 캐스팅 되었길래 원작보다 비중이 늘어났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마리를 사연녀로 만들 거라면 군악대장도 아예 한국식으로 훈남 실장님 캐릭터로 가는 건 어땠을까 ㅋㅋ 

농담이고, 그 좋은 목소리가 이렇게 낭비되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박사님과는 내가 앉은 자리 탓인지 극 내내 눈이 마주쳐서 본의 아니게 눈싸움 좀 했다.  

박성환 배우도 참 그런 역할이면서 얄밉게 노래를 잘해 ㅋㅋ 박사와 중대장의 케미는 마음에 들었다.


무대는 콘테이너 박스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3층 구조에 배경은 갈대밭으로 이루어져 심플하다.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극이 워낙 지루하다보니 세트라도 화려해서 중간 중간 환기를 시켜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등장인물들이 2층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올려다보느라 목 빠져서 죽는 줄 알았네.


뮤지컬 넘버는 선공개 되었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들어봤는데 

처음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보이체크란 작품과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내가 다크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기대했던 탓도 있지만 이번 작품 자체가 그 느낌과는 거리가 머니 차치하고.

곡을 먼저 만들고 장면을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이라서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민주주의~갈대줍기~죽느냐 죽이느냐(?)~루비목걸이까지 전체적으로 통일성도 없고. 

루비목걸이는 좋은데 그걸 부르기까지의 연결이 아쉬워서 감점. 

아, 근데 넘버가 중독성은 있나봐. 지금 자꾸 헤이호! 헤이호! 가 생각난다;;;


보이체크가 대형 뮤지컬로 만들어진 적이 없어서 세계 시장을 겨냥해 최초로 만들었다는데

지금 세계 최초가 대수냐고. 그 전에 잘 만들려고 했어야지 주객전도잖아. 

소재는 어두운데 뮤지컬이라서 가벼워진 거다? 아니, 뮤지컬도 충분히 무게감 있게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이건 뮤지컬이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못 만든 작품이야. 

스위니토드 같은 작품도 있는데.. 그래, 손드하임이 괜히 거장이 아니지. 


작품성이 떨어지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재미도 없고

후기도 안 쓰려다가 내가 기다린 세월이 아까워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