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일본에서 상연된 음악극「보이체크」프로그램북에서.
각본을 담당한 아카호리 마사아키의 글.
진정(陳情)
애초에 200년도 전 먼 과거의 독일 20세 안팎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에
우리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본디 그걸 보편성이라고 불러야겠고, 인간의 근간을 건드리는 양질의 작품이라고 칭찬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무지 나는 위화감을 불식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별 이야기를 위해 여자를 불러내어 밖에서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하니 근처 고깃집이라도 가서
사실은 1초라도 빨리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만「아니 이 맥주를 다 마시고나서」
「우선 소혓바닥 소금구이로 배를 채운 후에」「곱창을 먹으면서는 말하기 어렵지」
「무거운 이야기를 하면 갈비를 맛볼 수 없어」「하지만 냉면을 먹을 땐 산뜻하게」
「여기요, 우롱하이 한잔 더」등 질질 끌어 결국 만취하여 성교하고 아침이 된다는
뭐, 예시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알고 있다.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도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이야기되어왔을 테고 몇 번이나 분개하고 낙담하고 동정의 눈물을 흘려왔을 터이다.
하지만 도무지 나는 위화감을 불식할 수 없다.
미숙한 표현으로 말하자면「그 눈물은 단순히 자기도취가 아닌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말 깊이 생각한 건가」
「그 『알고 있다』라는 말은 오만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진부한 이야기지만 연극은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이 대화하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싸구려 호스트 같은 표층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일과성 호감을 바랄 생각은 없다.
무엇을 뜨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뭐, 붓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슬슬 얼버무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다.
이『보이체크』라는 작품은 약 200년 전에 실재했던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그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약 200년 후 현재 당신의 앞에서 다시 상연된다.
질 좋은 연극을 전해줄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극작가의 제멋대로인 주장입니다)
약 200년 전에 이런 우수한 희곡이 있었다는 전언자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런 연극 아카데믹한 사정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을 참이다.
그러니까 안이하게「잘 모르겠어」라고 부디 잘라버리지 말아줬으면 해.
그건 눈 앞의 인간이, 당신 바로 곁에 있는 인간이, 당신 자신이,
서투른 만화 캐릭터처럼 안이하게 분류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인생은 당연하게 복잡괴기하다. 혼돈 그 자체다.「잘 모른다」라는 게 우선 기본이야.
찻집에서 2시간, 당신에게 필사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결과「잘 모르겠어」라고 하면 너무나도 무정하지 않은가.
그건 이미 폭력이 아니겠는가.
그렇다치고. 200년 전의 보이체크라는 청년을 동정해줬으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만은) 이 이야기를 개재(介在)해서 당신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겠는가.
여기요, 우롱하이 한잔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