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무사시
3월 23일(일) PM 3:00
LG 아트센터 1열 어드메
요즘 공연 보고 후기 잘 안 쓰는데 그래도 이건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끄적끄적.
니나가와 유키오 연출의 무사시를 봤다. 무사시와 코지로의 숙명의 결투...정도 밖에 사전 지식이 없어서 때마침 테레아사에서 방송한 기무라 군의 무사시를 예습 삼아 보고 갔다. 그런데 이게 정말 '예'습이었다. 연극 무사시는 바로 그 뒷이야기였어;;; 드라마 캐스팅은 정말 안 어울린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연기도 연기지만 일단 다들 나이대부터가 어긋나서- 그에 비해 연극 무사시의 캐스팅은 적절했던 것 같다.
일단 이 작품을 본 첫 번째 목적은 후지와라 타츠야의 무대 연기를 보겠어!! 더 정확히는 니나가와 작품에 나오는 후지와라 타츠야의 천재성을 느껴보겠어!! 였기에 그 이야기부터 하자면... 음, 후지와라 타츠야는 후지와라 타츠야구나. 생각대로의 모습, 생각대로의 연기를 보여주었던 점에선 만족이고 뭔가 예상치 못한 모습이나 기대를 뛰어넘지는 않았다는 점에선 불만족이다. 확실히 후지와라는 무대 배우라는 것은 알겠더라. 이 배우는 죽어도 무대에서 죽겠지. 진짜 얼굴이 벌개질 때까지 발성을 토해내던데 그런 열정은 좋았으나 앞열에서 보기엔 부담스럽고 굳이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좀 뒤에서 봤으면 좋았을 걸 싶은 장면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그런 버럭류의 연기는 취향이 아니라서 결국 후지와라의 천재성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무대가 어울리고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라는 것은 알았다. 오히려 좋았던 건 발 연기였다. 발연기 아니다. '발' 연기다. 무사시는 시종일관 맨발 차림인데 마침 내 자리에서 그의 '발'이 잘 보여서 공연 내내 유심히 봤다. 그의 맨발이 지면을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좋았다. 미조바타 준페이의 버선발이 소리 소문 없는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발만 보고 있어도 이게 무사시의 발이고 저게 코지로의 발인 것을 구분해낼 수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 결투에 임하기 전, 옷 소매를 잡아올리고 이마를 질끈 묶는 모습 같은 게 기억에 남는다. 결론은 입 다물고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건데... 후지와라의 외모는 좀 더 넙대대한 인상인 줄 알았는데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나았다. 준수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빛, 존재감이 있었다. 다만 그가 내가 보았던 다른 좋은 배우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천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나는 아직도 그의 연기에 목마르다.
미조바타 준페이는 TV와는 조금 다른 인상. 실물이 더 낫고 어쩌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로서 무대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해보였다. 사실 미조바타 준페이 작품을 본 게 코난 실사판(;) 정도라서 -특히나 그 작품은 굳이 고르라면 핫토리 헤이지 역의 마츠자카 토리 군이 돋보였다- 평소 희미한 인상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무대 위에 서 있는 게 그림이 되고 잘생겼더라. 내 쪽으로 자주 와서 나도 모르게 얼굴 구경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포스로 따지면 망설일 것도 없이 후지와라인데 시선의 반대방향에서 빛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면 어김없이 미조바타 준페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심지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통수에서 빛이 느껴져 돌아보니 객석 통로에서 준페이 군이 무대 쪽으로 오고 있더라는. 나는 통로쪽에 앉은 것도 아닌데 그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아, 이건 나의 미남 레이더망의 활약인가;; 연기도 애당초 기대를 안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나쁘지 않았고 캐릭터 위에 배우 자신의 매력도 더해져 귀여웠다. 발성도 연속 3일 공연에 갈라진 느낌은 들었지만 무대 중심으로 활동하는 배우도 아닌데 이 정도가 되기 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를 생각하면 칭찬해줄 만 하다. 무엇보다 그 후지와라와 거의 대등하게 맞서는 느낌이 좋았고. 물론 그 후지와라는 전부를 내보인 건 아니고 준페이는 전부를 걸었겠지만 말이다. (아.. 근데 나는 보면서 니나가와 연출이 젊은 배우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시켰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어. 그 노력의 결과물이 이거라면 나는 그냥 마이크를 써도 좋아요. 이러다 배우들 잡겠수ㅠㅠ)
뜻밖에 좋았던 건 스즈키 안. 딕션도 정확하고 발성도 훌륭하고 연기도 잘한다. 그 나이대 젊은 배우들 중에선 발군의 실력이다. 외모도 여전히 귀엽더라. 자주 무대에서 보고 싶은 배우였다. 요즘 나이가 들면서 다른 여배우들에게 밀리는 느낌이 있는데 좀 더 다양한 곳에서 활약해주었으면 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코지군과 드라마를 찍었는데 스즈키 안 얼굴을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나서 부러웠다.
그리고 그리고! 요시다 코타로 씨가 넘넘 좋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이거지! 이런 배우지! 이런 연기지! 이런 여유지! 솔직히 두 주인공보다도 이분이 넘 좋아서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해지기도 했고. 확실히 중견 배우 분들이 젊은 배우들 보다 안정적이고 굳이 나 열심히 해요 티내지 않고도 잘한다. 젊은 배우들이 아무리 날고긴다 해도 저 연륜은 못 따라가겠지. 지인이 <한자와 나오키>에 나왔던 배우라고 알려줬지만 난 미처 몰라봤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완전 다른 사람이다. 아.. 11년에 내한했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못 본 게 아쉽다.
니나가와 유키오 연출. 과연 거장은 거장이다. 연출에 반해본 건 실로 오랜만. 담백하고 절제의 미학이 느껴졌다. 내가 그런 감상을 풀어놓자 지인이 이 연출과 정확히 반대지점에 있는 게 요즘 화제 되는 국내 모 창작 뮤지컬이라고 했다. 아직 그 작품을 보지 않았지만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 과함은 캐스팅 발표 때부터 느꼈거든 ㅋㅋ
배우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연출가의 손에서 거듭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오랜만이다. 그만큼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연출가의 힘이 느껴졌다. 초반 대나무 씬도 좋았고 (비록 지나치게 앞자리라서 검은 옷의 크루들이 열심히 대나무를 움직이는 트릭을 다 지켜보고 말았지만) 그 이후 장면 전환도 없이 오로지 이야기만으로 지루하지 않게 풀어간다. -물론 각본의 힘도 대단했다- 일본의 전통 문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이나 음악과의 조화도 훌륭하고 자연을 그대로 무대로 옮겨온 듯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대나무나 태양이 달로 바뀌는 상징성도 좋다. 어렵게 꼬지 않아도 단순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게 연출의 힘이 아닐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1막을 더 재미있게 봤는데 무사시가 추구한 <무겐노> 형식이 완성되려면 역시 2막이 중요한 거겠지. 커튼콜에서 정정한 모습을 뵐 수 있어 좋았다.
대여섯명 정도 등장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많은 배우들이 나와서 놀랐고 굉장히 작은 역인데도 열연을 펼쳐주었다. 후지와라 타츠야나 미조바타 준페이를 비롯하여 무사카 나오마사 씨-이분도 넘 잘하시는데 따로 언급하지 않은 건 깔 게 없어서 그래. 언급하지 않은 중견 배우진은 그냥 다 잘한다고 보면 됨- 라든지 TV 아니, 모니터에서나 보던 배우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봐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내한 공연의 덕을 봤다. 내가 일본 가서 공연을 보더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 그들을 볼 순 없었겠지.
공연 전에 우연히도 로비에서 지인을 만나 생각지도 않게 저녁 식사까지 풀코스로 달렸다. 한국 공연계를 걱정(?)하며 폭풍 수다를 떨다가 밤 늦게 헤어졌는데.. 공연계 지인은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비슷한 행동 반경에서 반갑게 마주칠 수 있다는 게 좋다. 그리고 또 다음 약속은 잡지도 않은 채 어딘가의 공연장에서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