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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말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용인 포은아트홀)

by 캇짱 2012. 11. 25.



뮤지컬 레미제라블 
11월 18일(일) PM 3:00
용인 포은아트홀 

레미제라블은 내게 특별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특별한 작품이 몇몇 더 있지만 레미제라블은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인생은 레미제라블을 알기 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로 나뉜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덕분에 삶이 조금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문화생활이라고는 한 달에 한두번 영화관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내가, 국내도 모자라서 옆 나라 극장까지 들락거리게 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엔 레미제라블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관심이 생긴 배우가 알고보니 뮤지컬 배우, 출연했던 작품이 마침 레미제라블, you튜브도 뭣도 없던 시절에 대행으로 힘들게 손에 넣은 레미제라블 CD를 100번도 넘게 들은 거 같다. 그게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구나.. (이게 오리지널 캐스트가 아니라는 게 반전 ㅋㅋ)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국내에서! 이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서울에는 내년 4월에나 올라온다고 하네. 근10년을 기다렸는데 몇 개월 더 못 기다리겠.................더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멀고 먼 용인 여행길(;)에 올랐다. 포은아트홀은 처음 가보았는데, 지하철역과 거리도 가까울 뿐더러 새로 지어진 극장답게 외관도 깔끔하고 좋았다. 그런데 나 1열인데 왜 10열에 앉은 기분이냐. 1열인데도 이 거리감은 뭐지? 흡사 극장 뒷자리에 앉아서 영화 보는 기분이었다. 마침 무대에 영상 기법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지 더욱 그런 기분이 들더라. 



간단히 배우들 이야기부터 하자면 테나르디에 부부와 앙상블을 제외하곤 모두 기대에.. 아니, 작품에 못 미친다. 딱히 그 유명한 10주년, 25주년 무대와 비교해서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오리지널판을 열심히 들어온 것도 아니라서.. 오히려 비교 대상이라면 일본판인데 일본판보다도 못하다. 바꿔 말하면 일본 배우들이 굉장히 잘했다는 거겠지만. 누구와 비교해서 어떻다라기 보다도 지금 이 배우들 역량에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은 버겁게 느껴졌다. 

장발장 - 왜 캐스팅된 지는 알겠다. 이미지만 보면 딱 이라서 그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이미지와 실제는 다르니까. 실제로 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았는데 그것은 비단 이 배우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작품을 대표하는 인물이다보니 더 엄격하게 평가하게 되는 면이 있는 거 같다.
1막의 연기는 다듬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표정이 한결 같고 장발장의 분노가 매우 일차원적이고 단순하게 느껴지는 점이 아쉽다. (이건 어느 정도 분장 탓도 있는 거 같다. 지저분하게 칠해놓으니 단점만 부각되어 웬만해선 찡그리는 표정 하나만 보인다.) 2막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1막의 그 일차원적인 감정이 종종 튀어나오는 순간이 있더라. 그보다도 문제로 느껴진 건 노래가 노래로 안 들린다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노래는 넘버가 아니라 대사를 의미한다. 레미제라블은 쏭쓰루 뮤지컬이라서 모든 대사가 리듬을 가진 노래로 되어 있다. 이게 참 어려운 게 대사를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리듬을 타면서도 연기를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이 배우는 대사 연기에 급급해 리듬감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래가 아니라 쭈욱 대사를 읊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것은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곡의 리듬감이 사라지며 생긴 단점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이 배우에게서 그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걸 보면 문제이긴 한 거겠지. 앞으로 공연하며 연기에 여유가 생기면 보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장발장이 등장한 장면에서 제일 좋았던 건 어린 코제트의 손을 잡고 '라라라라~♪' 노래를 할 때였다. 장발장의 그 많고 많은 장면 중에 이 장면이 제일 좋았다는 건 그만큼 다른 장면에서 임팩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한편, 이것이야말로 이 배우의 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코제트를 향한 무한한 부성으로 점철되는 그의 인생이 그 한 장면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극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을 정확히 잡아내고 있는 점은 높이 살 수 있겠다. 

쟈베르 - 이미지도 맞고 기본은 한다. 하지만 아직 쟈베르란 캐릭터의 겉만 핥고 있는 느낌이다. 쟈베르는 장발장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표면으로 드러나는 장발장의 고뇌보다도 더 큰 내적갈등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가석방 중에 도망친 장발장을 끝까지 추격하는 그는 얼핏 보기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밑바닥 인생들과는 다른 곳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역시 밑바닥 출신이라는 것이 이 캐릭터의 숨겨진 핵심이다. 처음은 감옥에서, 공장에서, 팡틴의 죽음 앞에서, 거리에서, 다시 바리케이트에서 그리고 하수도에서 장발장을 마주칠 때마다 쟈베르의 신념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며 끝내 자살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배우에게선 그가 강에 몸을 던지기까지의 심경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투신하는 장면이 조금 뜬금없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액션 자체는 강렬했지만 '어, 쟈베르 왜 투신하는 거야? 그럴 정도야?' 라는 게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 장면이 당위성을 가지려면 그 전까지 장발장을 명확히 의식하며 연기했어야 하는데, 아직 이 배우는 쟈베르란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그렇다 보니 상대 배우와의 화학 작용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쟈베르의 단단한 껍질을 쓰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이면의 끊임 없는 내적 동요가 느껴지진 않는구나. 다른 거 다 떠나서 마지막으로 장발장을 보내줄 때의 연기는 좀 더 섬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장발장과 쟈베르의 대치씬은 서로 대등하게 맞서며 상승효과를 노려야 하는데 아직은 두 배우 모두 각자 연기하는 느낌이 들고, 달려들기보다는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팡틴 - 이 배우는 늘 나에겐 아쉬운 배우인데 세간의 평가가 그만큼 박하지 않은 건 예쁜 얼굴 덕을 보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이번 팡틴 역의 연기는 매우 좋았다. 예쁜 여배우가 예쁜 척을 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내던지는 건 칭찬해줄만 하다. 다만 솔로 넘버는 좀 더 임팩트가 있을 줄 알았는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노래했구나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내 기대가 너무 컸나. 

테나르디에 부부 - 이미지, 노래, 연기 삼박자가 들어맞는 건 이 배우들 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작품의 위상에 눌리지 않고 제 몫을 하고 있다. 평소엔 테나르디에 넘버는 건너 뛰고 들을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는 캐릭터인데 이번에 보면서 참 많이도 웃었다. 오죽하면 테나르디에 등장씬을 기대하며 기다릴 정도였을까. 왜 이들이 이 작품에 필요한 캐릭터인지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으며, 못된 짓만 골라해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려주었다. 극장 전체의 분위기를 쥐락펴락 하는 훌륭한 무대장악력은 박수로도 부족하다. 

에포닌 -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땐 에포닌이라기보다 코제트에 어울리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연기하는 거 보니 왜 에포닌이 된 줄 알겠다. 신인 3인방 중엔 제일 낫다. 아직 신인 티를 벗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에포닌이라는 역할을 온전히 자기화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비슷하게 연기해낸다. 훌륭히 카피해낸 수준으로 아직 깊이는 없어보이지만 에포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은 갖춘 셈이라고나 할까. 다시 만났을 때 얼마나 성장해있을지 기대되는 배우다. 

코제트 - 이번 무대가 데뷔작이라는 걸 감안해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아니, 아쉽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럼 저 위에 아쉽다고 표현한 다른 배우들에게 실례다) 매력도 존재감도 없다. 그냥 거기에 아무나 세워놓고 '코제트야' 라고 소개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무색무취의 아마추어였다. 좀 더 자신의 색을 낼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당장 빨간 옷을 입히든 빨간 분칠을 하든 외적으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급선무 같다. 

마리우스 - 코제트와 함께 하는 씬이 많아 상대적으로 나아보이지만 결코 좋지는 않다. 오히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배우가 생초짜인 코제트와 한 묶음 취급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겠지. 요근래 이렇게 노래 따로 연기 따로 하고 있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 아예 노래만 잘하거나 연기만 잘하는 배우는 봤지만 이렇게 총체적으로 따로 노는 초보적인 배우는 일부러 찾기도 힘들어. 그나마 연기보다 노래가 강점으로 느껴진다. "헤이, 에포닌" 같은 대사는 진짜 국어책을 읽더라. 거센 소리도 심하다. '크(그)녀를 봤다면 바로 알케(게)될 걸' '정리(정의)의 다른 면' '악캥(악행)의 다른 면' '크(그)녀가 없타(다)면' '크(그) 색깔은 열정 크(그) 색깔은 절망' 기본적으로 '그' 발음이 안 되나? 왜 다 '크' 라고 하는 거야 ㅋㅋㅋ 일본 시키에서 활동하던 배우라 한국어 발음이 어색하구나 납득이 되다가도, 그럼 또 왜 굳이 한국어 발음이 어색한 배우를 쓰는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그 단점이 상쇄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도 아니잖아?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로서는 어색한 모습이 마침 순진한 캐릭터와도 맞아떨어져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그 안에 자리한 혁명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녀를 사랑할 때와 혁명을 논할 때, 시종일관 똑같은 톤으로 힘주어 노래한다. 그녀를 따라 떠날지 동지를 따라 갈지는 일말의 갈등조차 느껴지지 않고, 이 녀석이 바리케이트에 남은 건 그녀와 떨어져있는 비극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마리우스의 솔로곡 'empty chairs at empty tables'도 와닿지 않았다.   
에포닌이 죽을 때도 "안돼!" 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으면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인 거지. 이게 애드리브든 아니든 말로써 들려주지 않으면 감정 전달이 안 되는 딱 그 정도의 연기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느껴져서,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슬픔과는 다른 의미로 안타까웠다. 내가 마리우스역에 허들이 높기는 한데 (아마 이 배우 아닌 다른 누구라도 허점을 찾아냈을 거라 생각하지만) 기준치에 못 미치는 것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으니까. 부디 노래에 감정을 담을 수 있도록 연구하길 바란다. 음색은 나쁘지 않았으니 연기를 다듬으면 지금보단 나아지겠지. 

앙졸라 - 역시 왜 캐스팅된 지는 알겠다. 다부진 체격, 리더의 카리스마, 이미지는 정말 제격이었다. 다만 노래가 작품과 안 맞는 듯하다. 특히 고음으로 가면 목소리가 째진다고 해야 하나. 흔히 앙졸라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차라리 연기는 못해도 음색이라도 맞는 마리우스가 나에겐 더 듣기가 편했어. 이 배우가 창법을 바꿀 일은 없을 테니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가브로슈 - 아역에 많은 걸 바라진 않지만 그래도 은근히 비중있는 역인데 이렇게 흐릿할 줄은 몰랐다. 기본적으로 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에게 밑바닥 느낌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고, 적어도 노래할 때 '힘'을 실어주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올라온 무대는 신 연출판으로 기존의 회전 무대가 사라지고 영상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무대에 영상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적재적소에 활용된다면 그리 나쁘지 만도 않구나. 특히 하수도 씬은 영상이 있었기에 더 분위기가 살고 긴박감이 느껴졌다고 본다. 지난 연출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던 가브로슈의 죽음이 노래로만 처리된 건 아쉬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보여주지 않아서 더 안타까웠던 거 같기도 하고. 여하튼 시작부터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빠른 장면 전환은 볼거리였다. 과연 25년도 넘은 작품의 노하우가 느껴진다. 그동안 보아온 뮤지컬은 아무리 장면 전환이 빠르다고 해도 중간 중간 암전이 있거나 넘버가 끝나고 박수를 치는 타이밍에 서둘러 세트를 옮기거나 했는데, 레미제라블은 그런 빈틈이 전혀 없다.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노래인 것처럼. 그 장중한 노래가 흘륭한 스토리와 맞물려 한편의 대서사시를 그려낸다. 

다만, 그 매끄러운 연결에 방점을 찍어주는 넘버들이 살지 못해 그저 다이제스트판 보듯 되어버린 건 배우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느껴진다. 5권 분량의 방대한 원작에 비하면 뮤지컬이 다이제스트판이 되는 건 맞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축약본이 아니다. 훌륭한 넘버에 인물들의 감정이 살아 숨쉬고 있어, 단순히 원작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뮤지컬이기에 가능한 감동을 주기에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허나, 연기하는 배우들이 작품을 살려주기는 커녕 작품에 묻혀버리는 느낌이 아쉽구나. 그 와중에 '예쁜 색시'라든지 '내가 짱!' 이란 번역에는 좀 웃었고, 1열인데도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조명이나 대극장치고 만족스럽지 못한 음향은 개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질질 짜면서 보고 온 것치고 쓴소리가 많았지만 작품 자체가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레미제라블이 주는 그 어떤 거대한 기운에 압도되었다고 할까. 오케스트라가 빰빠빰빠- 연주를 시작할 때부터 눈물이 핑 돌았는걸. 그 음악에 앙상블까지 더해지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좋았고, 없던 신앙심도 생길 기세였다. 작품의 완성도만 본다면 감히 말하길 현존하는 최고의 뮤지컬이 아닐까.. 서울에 올라오면 한번 쯤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때까진 타이밍 좋게 개봉하는 영화나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