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마모토 코지/보이체크(Woyzeck)

음악극「보이체크」실황 CD 감상

by 캇짱 2014. 3. 5.


명색이 보이체크 감상이지만 어쩐지 야마모토 코지 감상이라고 써야할 것 같은 기분.

보는 것이 아닌 CD를 듣고 남기는 감상은 역시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CD는 총 2시간 15분(135분)이었던 상연 시간 중 85분 가량만 수록된 것이다. 

오프닝부터 잘렸다는데 말 다했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의미심장한 대사들도 상당 부분 편집되었다고 한다.

작곡가인 미야케 쥰의 이름을 걸고 나온 CD인만큼 편집의 기준이 '작품'이 아닌 '음악'이었던 거 같다. 

중요한 대사라도 배경음악이 없으면 과감히 편집하고

음악만 있으면 녹음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무리해서 넣은 거 같은 느낌. 

거의 밀녹 듣는 기분이랄까? 다만 5천엔을 지불했을 뿐이야;; 

애당초 정식 녹음이 아니라 단순히 기록용으로 녹음해둔 것을 관객 요청에 제품화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본다. 

제작 측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연 야마모토 코지의 연기로 다 설명이 돼! 다 이해 돼!

듣는 것만으로 눈앞에 장대한 무대가 펼쳐진다.


야마모토 코지는 미쳤다.


이걸 달리 뭐라 설명해. 진짜 미친 연기력이라고 밖엔.. 

작년에 모차르트를 연기하는 코지군을 보고 

'아아.. (10년을 봐왔지만) 이 배우에겐 아직도 더 보여줄 것이 남았구나' 생각했는데

보이체크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그냥 대충 연기한 거였네 ㅋㅋㅋ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대충 연기했다는 건 아니지만. 

1막 끝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때 느꼈던 감각 이상으로 보이체크를 연기하는 야마모토 코지는 강렬했다.


내가 뮤지컬 배우로서 코지군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뛰어난 가창표현력에 있다. 

가창력이라고만 하면 고음 쫙쫙 지르고 성량 빵빵 터지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굳이 '가창표현'이란 단어로 구별을 두는데..

그렇다. 이 배우는 노래로 하는 표현에 능숙하다. 대사가 물 흐르듯 노래로 이어지고 노래를 대사하듯 한다.

바꿔말하면 대사와 노래에 차이가 없달까.. 그냥 무대 위에 그 인물이 살아있는 것이다. 

노래에 실리는 감정에서 이 배우를 따라올 자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코지군의 남다른 리듬감이나 곡 해석력, 하모니 등 노래 자체의 재능도 뛰어나다고 보지만

(같은 곡을 다른 배우가 부르는 거 보고 이거 어려운 곡이구나 뒤늦게 깨달은 적도 많다)

역시 이 배우가 제일 빛나는 순간은 그것이 연기와 만나 융합될 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혼자 잠드는 밤은 술렁거림에 노랫 소리는 들리지 않아' 라는 가사가 있다고 하면 

'혼자'라는 가사는 쓸쓸한 느낌이 나고 '술렁거림'이란 가사는 정말 술렁거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감정을 노래로 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게 서투른 배우는 노래 따로 연기 따로 하고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배우라도 감정과잉으로 튀거나 혼자만 취해있거나 한다.

그런데 코지군은 완급조절도 뛰어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해준다. 

보이체크는 그런 그의 가창표현력이 절정에 달해있는 작품이었다. 


아.. 모르겠다. 그냥 다 좋네. 세상에서 야마모토 코지가 제일 연기 잘하는 거 같아ㅠㅠㅠㅠ

사실 이건 그의 공연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내가 그를 좋아해서 좋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 밖에 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이제 입 밖에 내도 될 거 같아. 

내가 인정 안 해도 그의 공연을 본 모두가 인정할 거란 확신이 든다. 


코지군의 연기는 이어폰으로 들으면 그 섬세함에 다시금 놀란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집중해서 그가 표현하는 모든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반대로 이건 이어폰으로 들으면 절대 안 되겠더라.

다 듣고 나면 호수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아.

아주 사람을 잡네 잡아..


그렇게 격한 연기를 펼치면서도 정확한 딕션을 구사하여 굳이 가사집을 볼 필요도 없다.

문어체 대사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원작을 읽으면서 이 현실감 없는 대사를 어떻게 표현하려나 궁금했는데 그걸 다 살리네..


보이체크 곡이 언뜻 단순한 리듬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음이 바뀌고 불협화음이 많아 어려운데

코지군은 배우진 중 거의 유일하게 '음악극'으로서 이 작품을 성립하게 해준다.  

사실 다른 배우들은 노래라고 할 만한 파트가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그나마도 가사를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전부 다 못 알아들으면 음질이 나빠서 그렇겠거니 하겠는데 코지군 목소리는 귀에 탁탁 와서 박히니까 하는 말이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을 구사하는 코지군의 탄탄한 기본기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처음 곡목 리스트를 보고 노래가 많다고 좋아했으나 알고 보니 타이틀만 다르지 거의 같은 멜로디의 반복이었다. 

이건 보이체크의 정신 상태에 따른 의도적인 배치로 보여지는데

같은 노랫말이지만 코지군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장사치 역의 네즈미 씨가 의외로 노래가 괜찮고 오프닝을 여는 중요한 역을 잘 소화해서 인상에 남는다.

모오락 때 츠루미 신고 씨도 그랬지만 일본엔 무대 경험이 풍부하면서 

시켜보면 뜻밖에 노래도 잘하는 중견 배우들이 많은 거 같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이라는 영어 발음이 너무 정직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대위 역의 단 지로 씨는 노래는 아쉬워도 (그걸 노래라고 할 수 있을까;;) 목소리에 무게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마리 역의 마이코는 발레를 해서 선이 예쁘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음원으로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고 연기 자체는 무난한 거 같다. 

안드레스 역의 이시구로 군은 발연기인가 아닌가 의심하게 하는 수준이었는데

코지군과 같이 나오는 장면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었다고 생각하련다. 

바보 칼 역의 코지군 팬(!) 라치 신지 군은 뮤지컬 배우라서 노래면에서 기대를 해봤지만

'숲이 본 꿈' 이라는 노래를 가성으로 부르는 정도로 딱히 가창력을 느낄 수 있을 만한 분량도 아니라서.. 

포토북에 실린 사진을 보아 하건대 비주얼은 역할과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음악극이지만 생각보다 대사 비중이 높다. 

뮤지컬보다는 연극에 가깝고 따라서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에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앨범이다.  

(물론 코지군을 좋아한다면 첨부된 포토북만으로도 충분히 5천엔의 가치가 있다+_+)

2CD는 거의 전 장면에 등장하는 코지군의 압도적인 연기로 듣는 것만으로도 쉬이 이야기에 녹아들 수 있지만

1CD는 코지군의 등장 여부에 따라 집중도에 차이가 있고 군데군데 튀는 편집으로 조금 산만한 느낌마저 든다.

보이체크의 오락가락하는 정신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노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만

듣는 것만으로 그런 연출 의도까지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왕이면 원작을 한 번 읽고 듣는 것을 추천한다. 

원작과 장면 순서는 다르지만 대사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듣다 보면 어느 장면인지 유추가 가능하다.


미야케 쥰의 곡은 가사 없이 그냥 음악만 있는 게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편이 더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특히 마리와 고수장이 바람을 피울 때 흐르는 음악은 음악 하나만으로 장면이 완성될 정도로 압권이었다. 

10월에 에이콤 신작으로 뮤지컬 보이첵이 상연되는데 미야케 쥰의 음악과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지.


하...... 진짜 가슴이 먹먹해서 죽겠다.

그렇게 기다렸던 CD였건만 듣다 보면 우울해져서

다시 들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