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 배지훈, 조민아, 최혜진, 신미연,
최재림, 이지송, 고비현.. 그리고 훌륭한 앙상블
조나단 라슨의 유작 RENT, 브로드웨이에서 12년간 공연된 RENT,
코지씨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RENT, 건명씨의 눈물의 RENT,
그 어떤 수식어를 갖다붙여도 부족함이 없는 RENT.
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말로만 듣던 그 RENT 일 뿐 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렌트 출신들이라,
렌트에 대해 많이 듣고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내가 그 배우들을 좋아함으로써 렌트와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 만남이 있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달까.. 그래, 너무 멀리 돌아왔다.
그 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난 시즌의 공연은 예매로까지 이어졌고
만약 그 때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공연을 보았다면 나와 렌트와의 만남은 좀 더 앞당겨졌을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이란 후회는 들지 않는다.
나의 첫 렌트로 이번 2009 렌트는 적합했다.
역대 렌트팀이 얼마나 훌륭했건 간에, 이들을 만나서 행복했다.
나와 비슷한 혹은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RENT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열정이 서린 무대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완성해가는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말로만 듣던 그 렌트가, 나의 렌트로, 나의 무대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번 렌트의 캐스트 면면들을 살펴보면, 평소 "나 뮤지컬 좀 보는 사람이야" 할지라도
쉽게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기 어려운 신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전대부터 활약했던 고명석 미미를 제외하고는,
고작 1-2년 전부터 무대 끄트머리에 겨우 섰을까 말까 한 신인들이며
심지어 이번 렌트가 데뷔 무대인 배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공연 초반엔 차마 입에 올리기 무서울 정도의 혹평을 들었던 것으로 안다.
이제 갓 날갯짓을 시작하는 배우들을 보조 장치 하나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았으니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을지 직접 보진 않았지만 쉽게 예상되는 바 였다.
가뜩이나 배우들도 못 미더운데 극장은 또 왜 이리도 큰 곳을 잡았던가.
객석을 채우는 건 고사하고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무대마저 채우지 못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모습들이 연상되었다.
아무리 원작이 훌륭하다 하여도 나사 하나가 어긋나면 전부 무너지는 곳이 무대다.
그런 불안불안한 무대는 당장에 나부터가 절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무시무시한 혹평에 당당히 맞섰다.
젊음의 열정으로, 패기로, 그리고 내몰렸던 벼랑 끝에서 급기야 자유로이 날갯짓 하기에 이른다.
내가 보았던 그들의 무대가 그러했다. 드넓은 무대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장을 꽉 채운 열기, 숨결, 땀방울..
환희의 눈물까지.
렌트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과연 조나단 라슨이 그의 전부를 쏟았다고 말할 법 하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이 무대 위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다음 세대에 전하려 했던 그의 메세지가 우리 배우들의 가슴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너 없이 난 죽어가- 라는 절망적인 가사가 오직 오늘 뿐- 이라는 가사와 맞물려
이렇게 희망적으로 들릴 수 있다니.. 그것이 이 무대가 가지는 힘이었다.
이 날의 로저는 커버인 김영웅씨였다. 로저 역의 유승현씨가 컨디션 문제로 하루 전날 김영웅씨로 교체되었다.
다행히 나는 이 사실을 미리 체크했고 김영웅씨의 로저도 궁금하던 차에 마침 잘 됐다는 기분으로 보러갔다.
고명석씨의 미미가 조민아씨의 미미로 바뀐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연장에 가보니 미처 체크하지 못한 관객들이 갑작스런 캐스팅 변경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일일이 전화는 못하더라도 문자 연락 정도는 줬어야 했던 게 아닐까..
김영웅씨의 로저는 꽤 호평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그의 출연일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확실히 그는 커버로 남겨두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비주얼부터 까칠함이 묻어나오는 그는 준비된 로저일지도 몰랐다.
뒤늦게 투입된 탓에 아직 로저라는 옷이 몸에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든 끼워넣은 모습은 칭찬해주고 싶다.
1막에서 아쉽다고 느껴졌던 부분이 2막의 연기로 전부 상쇄된다.
마크와의 다툼과 미미의 죽음에 절규하는 그는 제법 로저다웠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호평과는 별개로
그의 출연일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에 대해선 한 마디 해두고 싶다.
앞서 말했지만 이번 렌트는 유난히 혹평이 많았고 그 짐을 오롯이 짊어져온 건 유승현 로저다.
물론 김영웅씨도 앙상블로서, 커버로서 렌트라는 한 배를 타고 열심히 노를 저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렌트가 저 험난한 파도를 헤쳐나가는데 앞장 서서 키를 잡고 있던 건
유승현 로저라는 말이다. 그런데 정박할 항구가 코 앞에 보이는 시점에,
파도가 좀 잔잔해졌다고 해서 선장에게서 키를 빼앗다니..
낮공에 좀 끼워넣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막공날은 유승현 로저가 전부 담당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더블로 가던지 중반부터 투입되었으면 납득이 가지만
막공을 1주 남겨둔 시점에 이런 식의 캐스팅 분배라니..
대외적으로야 유승현씨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라지만
실질적으로 김영웅씨에 대한 호평이 아주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야 볼 수 없다.
유승현씨가 아예 하차하지 않는 걸 보면 충분히 무대에 설 수 있는 상태라는 건데,
배우에게서 무대를 빼앗는 것 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괜한 걱정이겠지만 몸 망친 사람 행여 마음까지 다칠까봐 신경이 쓰인다.
그 동안 고생한만큼 마지막 영광 정도는 마음껏 누리게 해줬으면 한다.
잠시 이야기가 샜는데, 캐스트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조민아씨의 미미는 의외로 괜찮았다. 연예인 캐스팅에 대한 반발심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신인 뮤지컬 배우로 봐주면 좋겠다.
들고양이가 아니라 집고양이로 보이는 게 문제지만 고양이는 고양이니까.
솔로는 아쉬웠지만 그 집단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그렇게 가수가 아닌 배우로 렌트에 녹아든 미미였다.
마크. 마크. 우리 마크 역의 배지훈씨.
앞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렌트 출신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바로 이 마크를 연기했었다. 그래서 더욱 유심히 봤다.
내가 생각했던 마크의 이미지 보단 보컬색도 그렇고
조금 둥글둥글한 이미지의 마크였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특히 미미가 죽어갈 때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마크의 뒷모습이 좋더라..
마크는 또래 집단에서 유일하게 에이즈 환자가 아닌 인물로
늘 밝은 모습을 가장하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번 걸러 세상을 보고 있다.
실은 친구들이 모두 죽고 혼자 남겨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의 뒷모습에서 그 두려움을 읽었다. 훌륭한 배우다.
모린 역의 최혜진씨. 경력을 보니 특이한 사항으로 <H-art> 야외공연이 눈에 띈다.
오죽 쓸 경력이 없으면 이걸 썼겠냐만.. 나로써는 재미있는 발견이었다.
그 때 그 <Fame> 무대에 그녀가 있었구나!
앞뒤로 나온 쟁쟁한 뮤지컬 배우들과 확연히 비교되던
어느 대학의 연극부 학생들 정도로 보이는 집단의 조금은 어설픈 무대였더랬는데..
그랬던 그녀가 이만큼이나 성장했다.
모린은 1막 후반부 쯤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단번에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미미 역을 해도 제법 어울렸을 것 같다.
콜린은 공연 보기 전부터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간터라 기대가 컸는데,
와우-! 정말 이 작품으로 데뷔하신 겁니까?
엔젤이 죽을 때는 어찌나 눈물샘을 자극하던지..
일렬로 늘어선 그들의 노랫 속에 엔젤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슬펐다.
나도 모르게 자꾸 그 빈자리로 시선이 향하더라.
정작 엔젤은 처음엔 좀 적응이 안 되었다. 아무리 나에게 있어 이번 렌트가 처음이라 해도
들어오던 OST가 있으니 호영 엔젤의 러블리한 음성이 자꾸 귓가에 맴도는 것이다.
지송 엔젤의 Today For U 는 노래 따라가기에 급급한 느낌이어서 살짝 실망..
배우 자신이 좀 지쳐보이기도 했고.
(비단 엔젤 뿐만이 아니라 이번 렌트 멤버들이 대체적으로 솔로가 약하고 함께 있을 때 강하다)
하지만 후반부 갈수록 캐릭터가 살아났고, 죽으면서 천 뒤집어쓰고 절규하는 부분(;)은 특히나 좋았다.
앙상블은 말할 것도 없이 최고다. 사랑스러운 거지들 하며..
여기에 일일이 다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이번 렌트 멤버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좋다.
객석에서 처음 RENT 를 듣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 무대와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