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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코지/뮤지컬 TL5Y

뮤지컬「The Last Five Years」2010 in 오사카 (5)

by 캇짱 2010. 12. 26.

앞서, 넘버를 소화함에 있어 코지군만의 색깔이 강해졌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반대로 안무나 동작에 있어서는 배우 본연의 색을 죽이고 철저히 제이미로서 존재했는데, 이것은 초연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내가 이번 제이미를 '새로운 제이미' 라고 받아들인 데에는 이러한 차이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배우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자주 쓰는 동작이나 몸짓이 있기 마련인데, 특히나 이 작품은 몇몇의 정해진 동선을 제외하곤 극에 필요한 대부분의 움직임을 코지군의 즉흥적인 표현(애드리브)에 기대고 있어, 더더욱 그러한 버릇들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배우를 이 작품에서 처음 만났다면 그저 잘하네~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지켜봐온지가 햇수로 벌써 다섯 손가락을 차고도 넘었다. 덕분에 그의 버릇들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고, 초연 무대는 분명 처음 접한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낯익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삼연에선 그러한 버릇은 철저하게 배제된 모습이었다. 벌써 3번째, 지속적으로 상연되고 있는 무대인데다 연출도 같고 출연하는 배우도 같다. (여배우는 바뀌었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제이미에 국한되어 있으니까) 굳이 안무를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안일하다느니 말하기 이전에 단순히 생각해도, 겹치는 동작들이 있을 법도 한데.. 초연 때도 느끼지 못했던 안무의 신선함을 삼연에 와서 느끼다니!! 지난 5년 동안 코지군의 표현력이 일취월장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배우의 애드리브에 기대었던 이전 무대와 달리 이번에는 어느 정도 안무가의 손을 거치지 않았을까 추정(;)되는 짜임새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든 간에 그의 버릇을 감추는데 성공했고, 이미 이 무대를 접한 사람에게도 충분히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애드리브로 적당히 리듬을 타는 코지군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지우고 철저히 그 역할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그가 배우라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책을 던져서 받는 걸 성공하지 못하자 잘 보이지도 않는 무대 한켠에서 몇 번이고 재시도하고 있거나 (될 때까지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원고 용지를 뭉쳐서 저글링을 하거나 (초연에선 비행기를 접어 날렸더랬지) 하는 깨알같은 애드리브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 작품 최대의 볼거리라고도 할 수 있는 슈무엘송. 제이미가 자신의 소설을 캐서린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원작과 달리 일본 무대는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제이미의 신작 발표회(?)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 무대는 보다 화려하게 보이기는 할지언정 이 넘버의 궁극적인 목적(슈무엘의 이야기를 거울 삼아 캐서린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를 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된다.[관객=캐서린]으로 본다면 그럭저럭 납득은 가지만, 역시 이 부분은 무리해서 스케일을 키울 필요 없이 둘만의 소소한 에피소드 느낌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그나마 코지군이 '캐서린에 대한 사랑' 을 신경써서 연기하고 있어, 원작의 의도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건 다행한 일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僕も世界中に君を知ってほしいのさ。こんなに素晴らしい君、羽ばたくチャンス。
보쿠모 세카이쥬-니 키미오 싯테 호시이노사. 콘나니 스바라시이 키미, 하바타쿠 챤스
나도 온 세상이 너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멋진 네가 날아오를 찬스야. 

인데, 세카이쥬- 할 때 코지군 목소리가 정말 좋다. 이 부분에서 제이미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캐서린을 스타라며 치켜세워주는 장면도 정말 좋아했는데 아쉽게도 이번 무대에선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연의 슈무엘송은 초연보다도 더욱 제이미의 원맨쇼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캐시에 대한 사랑의 노래라기 보다 제이미 자신의 '芸(재주)'를 뽐내는 자리였달까. 모자와 마네킹이라는 소품도 추가되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아니라 '보여주는' 에 한층 충실한 무대가 되어있었다. 물론 볼거리는 풍성하고 좋았으나 과유불급이라고.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 넘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한 느낌. 초연과도 재연과도 차별을 두기 위해 노력한 점은 가상하나 아무리 그래도 제이미에게 탭댄스까지 추게 하는 것은 너무하잖아;

조금 목적이 어긋난 듯한 연출의 문제는 접어두고 순전히 제이미가 보여준 재주와 볼거리면에서는 즐거웠다. 나무로 만든 마네킹을 앞에 세워두고 그 마네킹을 마치 슈무엘이 사랑에 빠진 아가씨인양 대하는데, 그야말로 소설 속 한 장면의 재현이었다. 이 때의 마네킹은 보통 옷 가게에 많이 있는 차도녀 스타일이 아니라 진짜 재봉사의 작업실에 하나쯤 있을 법한 상반신 마네킹으로





마침 연습 모습을 담은 동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분 27초경 여배우 뒤로 살짝 보이는 마네킹이 바로 슈무엘송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는 소품이다. 처음 이 영상을 봤을 때 저 코트 길이가 너무 길어 거추장스러워보인다고 했는데 실제 무대에서는 아주 적절한 길이감이었다. 저 코트를 마네킹에 두르자 묘하게도 여성이 입은 드레스 같아 보였으며, 그걸 또 코지군이 입자 펄럭이는 느낌이 꽤나 좋았다. 모자에 롱코트, 그리고 중간중간 지팡이까지 돌려가며 재주를 선보이는 제이미. 알고보면 제이미의 직업은 마술사였던 걸까 ㅋㅋ


신작(新作), 아직 출판되지 않은 크리스마스 단편 소설
유대인 마을 크리모비치 재봉점. '슈무엘의 이야기' 라고 하자

메리크리스마스-!


슈무엘은 매일 밤 10시 반까지 일하고
새벽이 되기 전에 일어나 다시 일을 계속하지

41년을 이 재봉점에서 보낸 남자
단 하나 이루지 못한 꿈이 있어

"가능하다면 나는 꼭 만들고 싶은 드레스가 있어.
아름답고 애처로운 전설의 드레스. 하지만 시간이 없어" 라는 슈무엘
그러자 시계가 빛나며.. 말을 하네

나나나나나나~ 자, 슈무엘, 꿈이 이루워질거야
나나나나나나~ 무한한 시간을 줄게
나나나나나나~ 자, 슈무엘, 바느질을 시작해 봐

하지만 슈무엘은
"이 인생, 제 능력껏만 하고 살면 되오"

슈무엘은 매일 밤 10시 반에 말하지
"잘자, 크리모비치"
그 뒷모습을 시계가 불러세웠어

"너는 누구나 인정하는 마을 제일의 호인이야"
그러니 슈무엘 꿰어줘, 바늘 한땀이라도"

슈무엘은 말했어
"운명은 거스르는 게 아니오"
시계는 "슈무엘, 가끔은 규칙을 벗어나" 라고 했어
더 이상 슈무엘은 맞설 기력이 없어 벨벳천을 꺼내며
"여느 때 같으면 틀니를 빼고 잘 시간인데" 라고 한숨을 쉬었어

시계는 나나나나나나~ 자, 슈무엘 꿈을 붙잡아
나나나나나나~ 무한한 시간을 줄게
나나나나나나~ 지금이야말로 꿈을 이뤄봐

조용한 밤 달빛에 의지하여 바늘구멍에 실을 끼우고
벨벳천에 찔러넣었을 때 딱 열리는 마법의 열쇠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네
슈무엘의 손은 춤을 추고 옷감은 하늘을 날아다녔어

모든 단계가 정확하게 신이 내린 것처럼
울먹이며 슈무엘은 말했어

"되돌려줘, Take me back! 그 시절로"

정적의 밤이 지나고 드디어 드레스가 완성되었어
기지개를 켜고 눈을 감자 태양이 그를 비추네

그 드레스는 꿈처럼 저 하늘의 영혼을 유혹해
짜투리도 없고 버릴 것도 없이 안타까울 정도로 반짝이며
그리고 되살아나는 41년전의 꿈
슈무엘의 사랑이..

그 드레스는 오데사에 사는 아가씨가 입었던 것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날에
그 상대는 슈무엘
신분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사랑에 빠졌지

함께 떠나는 것이 두 사람의 꿈
하지만 버릴 수 없었던 크리모비치
그 모습, 지금의 너와 같지 않니?

세상이 두려워 제자리걸음 하는 너도
사실은 드넓은 하늘을 꿈꾸고 있을테지

나도 온 세상이 너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멋진 네가 날아오를 찬스야
지금까지의 자신에게 안녕을 고하고
오늘부터 캐시 하이아트, 너는 스타야

그래
나나나나나나~ 캐시 꿈을 붙잡아
나나나나나나~ 무한한 시간을 줄게
나나나나나나~ 아르바이트 생활도 관두자

너만을 보는 나와 너를 기다리는 무대가 있어
붙잡아 붙잡아 이 찬스를, 지금을..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사랑으로 충만해


이 넘버 안에는 슈무엘, 시계, 그리고 제이미까지 총 3개의 인격이 존재한다. 반드시 이렇게 노래해야 한다고 정해진 법칙은 없지만 보통은 슈무엘 즉, 할아버지의 연기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지난 초연 때만 해도 코지군 역시 그 보통의 범주에 가까웠는데 이번 무대에선 조금 다른 양상이었다. 슈무엘의 연기가 보다 능숙해진 것은 물론이와 시계의 인격까지도 확실히 구분을 두어 연기했다. 슈무엘에게 무한한 시간을 약속하는 시계의 속삭임은 어둡고도 달콤했으며, 거기에 장난스러운 느낌도 가미되어 마치 악마의 유혹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의자에 앉아 모자를 돌려쓰며 슈무엘과 시계를 번갈아 연기하는 모습은 지킬 앤 하이드의 한 장면 'Confrontation'을 연상케 했다. 





은색의 십자가 문양은 모자의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다. 코지군은 바로 이 의자에 앉아 모자를 반바퀴씩 돌려쓰며 (십자가 문양을 보였다, 안 보였다) 서로 다른 인격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덧.
바로 이 TL5Y 티켓을 구해주었던 지인과 몇달 전 한국에서 미스사이공을 함께 보았다. (Y상과는 처음 건명씨 팬으로 만나 의기투합, 지금은 종종 메일이나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로 발전했다) Y상은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볼 정도의 팬은 아니지만 코지군에게도 꽤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 듯, 이번 TL5Y도 2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미스사이공을 기다리며 엉뚱하게도 TL5Y로 불타오른 우리는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며 놀랄 정도의 일체감을 맛보았다.
그런 Y상이 두번째로 보았던 날 앞자리에 조정석 씨가 있었단다. Y상은 한국 뮤지컬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건명씨 작품을 위주로 체크하는 편인데, 조정석씨를 알아본다는 건 놀라웠다. 처음엔 한국판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출연한 배우라고 하길래 김무열상? 이냐고 되물었더니, 아니라고. 지난 번에 보았던 분이란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Y상이 한국에 왔을 때 정석씨가 게스트로 출연한 마티네 콘서트를 함께 보았었다. 그 때 정석씨가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출연 중이어서 헤어스타일이 굉장했는데, 오해하지 않도록(?) 한국판 모리츠라고 설명해줬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 기억력에 감탄하며 든 의문. 도대체 조정석씨는 왜 일본까지 가서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 를 보았던 것인가? 우연히 일본 여행 중에 들렀을 수도 있지만 보통 일본 뮤지컬을 본다하면 시키나 토호의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왜! 하필! 굳이! 라스트 파이브 이어즈였던거지? 설마 이 작품 하려고? ...는 아닐 테고.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재작년 이 맘때 쯤, 코지군이 라디오 수록차 한국에 왔을 때 겸사겸사 한국의 헤드윅 공연을 보고 갔었다. 당시 보았던 캐스트가 조정석씨였나, 하고 스케쥴표를 찾아보니 맞구나! 이거야!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 범인은 이 안에.. 가 아니고(;)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 그 날 조정석씨 말고도 객석에 연예인들이 많았다고 하니 아마 코지군이 날 잡아 초대를 한 것이겠지. 코지군과 정석씨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합인데 의외의 인연이었다. 앞으로도 한일간의 좋은 인연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랄까, 정석씨 공연 보러 가면 코지군 만날 수 있나요 <- 그거냐! 
  

나름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올려보는 TL5Y의 후기. 아마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6)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