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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코지/뮤지컬 TL5Y

뮤지컬「The Last Five Years」2010 in 오사카 (2)

by 캇짱 2010. 4. 30.


우메다 예술극장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철저한 사전 조사로 오사카의 전 지하철 노선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나지만, 지하가 아닌 지상에선 속수무책으로 헤맸다. 극장 측에서 제공한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맞게 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걸어도 극장은 나오질 않고 여긴 어디? 나는 뉴규? 결국 교통정리하던 경찰 아저씨를 붙잡고 물었다. 일본에서 길을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대부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아니면 인력거 끄는 아저씨의 설명을 훔쳐듣거나 (이 방법은 교토에서 길 찾을 때 유용하다 ㅋㅋ) 경찰 아저씨 말이 저기 au 간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가다가 길을 건너 또 오른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그러니까 그냥 왔던 길 돌아가라는 진리의 말씀(땀) 완전 반대로 오고 있었다. 결국 스타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어찌어찌 무사히 당도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도 헤맸다는 거. 분명히 극장을 등지고 걸어갔는데 한참을 걷다보니 다시 극장이 보이더라는 얼토당토 않는 일을 경험했다. 그렇게 찾을 때는 안 나오더니 간다니까 붙잡아;;


헤맸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아직 개장 시간 전이라 근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딱 알맞다. 어느 새 늘어서있는 줄에 합류하여 로비로 입장, 바로 보이는 판매대에서 프로그램을 구입했다. 포스터만 봐도 이번 프로그램은 알록달록할 거라 예상을 했다만, 설마 속지도 알록달록 할 줄이야;; 결정적으로 화보집이 아니야!! 그 동안 프로그램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부 홍보 사진 찍을 때의 컨셉 뿐이었다. 그닥 새로울 것 없는 사진에 그나마 가사가 실려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려 했으나, 지금보니 전부 실려있는 것도 아니네? 정작 궁금했던 'Moving Too Fast' 나 'A Miracle Would Happen' 같은 빠른 템포 넘버의 가사는 없다. 그거 한페이지 더 찍어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더냐ㅠㅠ



사실 이번 공연, 프로그램 보다는 굿즈를 노리고 갔는데 내가 본 게 막공 하루 전날의 공연이라 전부 완매가 된건지, 지방 공연이라서 판매하지 않는건지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노렸던 건 B번 슈무엘의 시계. 참고로 C번은 제이미와 캐시가 함께 살던 아파트 열쇠 되시겠다. 실제 물건이 괜찮으면 내 것 외에도 이 작품을 좋아하는 몇몇에게 선물할 요량이었다만 선물은 커녕 어떻게 생겨먹은 물건인지 확인조차 못하다니, 아쉽게 되었다. 역시 웬만하면 도쿄 공연을 보는 게 좋다.

웬만하면 도쿄 공연을 보는 게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극장 문제인데 아무래도 도쿄가 메인 무대인만큼 무대 세트가 도쿄 극장에 맞게 만들어졌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솔직히 우메다 예술극장은 TL5Y를 올리기엔 조금 크지 않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비웃듯 세트를 극장에 맞춰 관람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직사각형의 무대에 대각선 방향으로 또 하나의 무대를 올려 공간을 축소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직사각형 무대의 남은 공간인 양사이드로는 검은 막이 내려와 있어 원래부터 아예 없던 공간인 것처럼 연출했더라. 양사이드에 앉은 사람에게는 약간의 시야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승리의 중앙(!)이었으니까. 으하하. 자리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무슨 11열이 세종 5열 같아. 사실 11열이라고 해서 망원경까지 챙겨갔는데 웬걸, 오히려 방해다. 맨 눈으로 코지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는 것까지 다 보였다. 공연 내내 자꾸 코지군이랑 시선이 닿아서 너무 좋았어ㅠㅠ 날 보면서 노래했다구!! 무대가 전체적으로 보이면서 배우 표정도 보이다니 공연 관람에는 최적의 좌석이었다.

무대 세트는 역시나 심플하다. 제이미의 책상 하나와 캐서린의 체스트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는 나무 궤짝) 하나. 벽에는 시계가 비치고 현재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의 시계는 소품으로 걸려있는 것이 아닌 빛으로 투영한 것이다. 현악기의 조율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이 꺼진 극장에 익숙한 선율이 흐른다. 다시 조명이 켜졌을 때 무대 한편에는 제이미가 있었다. 나는 이 순간부터 깜짝 놀랐는데, 이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왜 놀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작품은 남녀 주인공의 시간축이 엇갈리며 캐시-제이미-캐시-제이미-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캐시가 먼저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이미가 먼저 등장한 것이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무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야마모토 코지라는 노련한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연출이겠지. 언젠가도 말한 적 있지만 배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에너지가 넘쳐서 객석까지 장악해버리는 구심력을 가진 배우, 눈을 뗄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어 거꾸로 관객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원심력의 배우. 야마모토 코지는 그 중 후자다. 사실 제이미가 무대에 먼저 등장했다고 해서 특별히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상에 앉아있을 뿐.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시선을 모으기엔 충분했다. 이 허를 찌르는 연출은 극의 마지막, 무대 위에 혼자 남겨지는 캐시와도 맞물려 정확히 대칭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그 마지막과 이 처음은 이어져있어 두 사람의 시간은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다. 캐시의 행복한 마지막과 제이미의 행복한 시작은 사실은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 서로 맞닿아있는 거겠지. 그런 부분까지 의도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연출이었다. 암전 속에서 눈을 감고 있던 제이미가 조명이 들어옴과 동시에 눈을 떴을 때 제이미의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캐시의 시간도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제이미가 떠났음을 알리며 등장하는 캐시. 일단 음색은 합격점이다. 넘버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 감정도 좋고 노래도 생각 이상으로 해주고 있다. 절대 기대 이상은 아니다. 애초에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음정이 불안불안하지만 듣는 입장에서 최대한 무시해보려 한다. (바이브레이션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 떨림은 뭐다냐) 그런데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목소리. 음색이 좋다더니 또 무슨 말인가 하면, 신기하게도 한 사람의 목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나온다. 메인이 되는 목소리는 넘버와도 어울리고 예쁜데 동시에 뭐가 걸린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도 함께 나온다. 허스키한 목소리도 개성이니까 좋게 들어줄 수 있지만 맑은 목소리와 허스키한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는 건 좀 참기 힘들더라. 노래 연습을 많이 해서 목이 상했다고 하기엔 고음은 쭉쭉 잘도 올린단 말이지. 아, 또 한 가지. 고음은 잘 올리면서 중간음에선 반음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말했죠. 노래 할 줄만 아는 여배우라고. 절대 잘 하는 건 아님ㅠㅠ) 어쨌든 연기가 되는 아이였다. 이 역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게 마이너스 요인이었지만 오히려 참신함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건데,

제이미가 'Moving Too Fast' 를 부르는 중간에 삽입되는 캐시의 전화 통화. 이 부분은 대부분의 배우들이 잘 나가는 제이미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캐시-라는 컨셉으로 연기한다. 대표로 한국의 해선 캐시는 이런 느낌.  



나는 그녀의 연기를 좋아하고 여기서는 이런 느낌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사실 그것 말고 다른 연기가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본 무라카와 에리는



"지금 내가 봐도 꽤나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해" 라는 대사에 맞춰 신이 나서 이곳저곳 찔러보는 순진한 캐시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외모상 누가봐도 지금이 제일 적기인 그녀에게 닳고 닳은 느낌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아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눈치없는 아가씨 컨셉으로 연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나쁘지 않았다는 거지 좋았다는 건 아니다. 아무리 들어도 저 때 저 연기는 너무 튀어!)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기는 슬픔에 잠겨있는 극 초반부보다 잔뜩 들떠 꿈을 이야기하던 후반부가 더 기억에 남는다. 톰 크루즈 흉내내는 건 정말 귀여웠어!

어찌됐든 적어도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극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고, 상승효과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저 코지군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는 점에 감사한다. 오사카가 고향이라서 관객 모두가 친척 같이 느껴졌다나~ 그런 부분도 감안해서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해주었던 거 같다. 실제로 보면 꽤 귀엽고 반짝반짝한 느낌의 배우이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이 들어서 앞으로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된다면 제법 반가울 거 같아. 뮤지컬 무대에서 보고 싶지는 않고; 

(3)에 이어집니다..